• 아래의 내용은 David M.Carson 박사의 박사논문 Transplanted to America(부제: A popular History of the American Covenanters to 1871)의 첫 부분을 번역한 내용입니다.(양남식 번역)

    교정이 필요한 첫 번째 드래프트 입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서두(Introduction)

    개혁장로교회는 그들의 기원을 거칠고 급변했던 역사들로 가득 찬 16-17세기의 스코틀랜드에 두고 있다. 그들의 원리와 자각속에서 발전된 관점들은 그 당시의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사건들에 대한 응답이다. 18세기 초, 이러한 원리들은 확고한 믿음의 형태들로 결정체를 이루어가며, 신대륙으로 이민을 간 여러 개인들을 통해 미국으로 전달되어졌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소개하기 위해셔는 간략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역사가 필수적으로 뒷 받침 되어야만 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에서의 학업 동안 일부 루터파의 가르침을 흡수한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으로 부터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1528년, 그가 전하는 사상들을 막고자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의 화형의 연기들은 바람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신념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넓게 확산되어졌다. 그리고는 이 운동은 갑작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거의 1560년 일년 사이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변화되어진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법에 의한 종교개혁의 성취를 선언하게 되고, 개혁된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가 처음으로 만남을 갖는다.

    그 해의 변화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존 낙스이다. 그의 개혁신앙으로 인해 일찍이 추방당했던 그는 제네바로 피신하였다가 존 칼빈과 제네바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1560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죽음은 맞이하는 1572년까지의 12년 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낙스의 설교로 인해 깨우쳐졌으며, 카톨릭 옹호자인 메리와의 격전속에서 정치인이자 목회자로서 보여준 낙스의 두려움없는 모습에 더욱 담대함을 얻어갔다.(첫 번째 권징집은 장로교회 체계의 초기 형식의 윤곽을 그려주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또한 낙스를 통해 칼빈 신학의 영향을 받게된다. 그렇게 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정치체계에 있어서는 장로교회가, 교리에 있어서는 개혁교회 또는 칼빈주의자들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인 1603년 죽음을 맞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통합) 영국 왕국의 제임스 1세가 된다. 어린 왕 제임스 1세는 권징에 있어서 너무 완고했던 그의 장로교인 후견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좀 더 성숙한 나이가 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divine-right)에 입각한 절대군주가 되기 위해 영국의 주교들을 다시 찾게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제임스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괴멸시키고 스코틀랜드에 국교회를 세우고자 한다.

    더욱 고조되어진 긴장은 1637년에 영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받은 기도책을 에딘버러의 성 길레스(St.Giles)교회의 예배에서 처음 사용되면서 폭발하게 된다. 여기서 불러일으킨 정서는 1638년 National Covenant에서 그 표현이 그대로 들어난다. 1638년 National Covenant 는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서약되었고, 그 결과로 장엄한 주교전쟁(the Bishops Wars)의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의회 역시 공통적인 이유들 안에서 스코틀랜드의 손을 들어주며, Solemn League and Covenant로 엄숙 동맹을 맺는다. 영국인들에게는 동맹으로 또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언약이 되는 이 연합은 개혁된 기독교와 의회의 정당한 권리와 특권을 위해 성사되었다.

    여기에 이어 영국의 시민전쟁(Civil War)이라는 유사한 역사가 발생한다. 찰스 1세의 패배와 처형으로 의회내의 장로교인들을 잠시 동안의 통치가 이루어졌다.(이로 인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회집과 그들을 통해 가히 놀랄만할 문서들이 –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 만들어진다.) 그 역사는 얼마지나지 않아, 크롬웰 집안의 짧은 지배와 마지막의 스튜워트 가문의 복귀로 이어진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의 회복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깨달은 것은 이전과 아주 유사한 문제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찰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언약으로 맹세했던 것 조차도 그를 장로교인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1660년 그가 왕권을 잡은 이 후 4년 동안 무려 400명의 목회자들이 스코틀랜드내의 영국국교회의 속성들이 자라나는 것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와 위치에서 쫓게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약 25년 정도의 시간동안은 스코틀랜드에 약간의 평화가 있는듯 싶었다.

    목회자들 중 어느정도의 타협의 의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왕이 재차 관용을 베풀며 고위관직제의 영향아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들의 목회지로 돌아가도록 설득됐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여전히 설득당하지 않은 무리들이 남아있었으며, 타협으로 왕의 관용을 얻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거부하는 성도들도 나오게된다. 그러한 두 그룹의 선은 더욱 극명하게 그려지게 되고, 마침내 1680년 리차드 카메론은 샌쿼할(sanquhar)이라는 마을로 들어가 시장내의 십자가위에 폭군이자 강탈자인 찰스 스튜어트와 의절하겠다는 선언서를 붙이게된다.

    이것은 찰스와 그의 동조자들이 유죄로 인정한 종교적인 범죄위에 반역이라는 죄를 더 얻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메론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그 후 8년동안 너무나 끔찍한 박해를 받게 된다. 이것이 황무지에서 비밀 집회를 가지고, Claverhouse 와 the dragoons의 날들이며, the Test Oath 의 날들, 그리고 악취나는 감혹과 순교자들의 무덤들에서 예배드리던 시간들, killing time 이다.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왕의 페위에 동참하게된다. 오렌지의 윌리암 왕자가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네델란드로 왔을 때, 그 곳에는 두 개의 왕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울 만한 평화로운 기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게, 그는 그 곳 두 왕국들에 그들 각각의 교회를 세우는 것을 제안하게 한다. 평화가 약속된 듯한 그런 타협은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결국은 그러한 방식이 정착된다. 그 이후로 영국은 국교회 국가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 일부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의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그들이 왕에게 통치되지 않는 교회를 이루고자 싸워왔다는 것에서 야기된다. 현재로써는 왕의 대사 없이는 총회가 소집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왕이 할 일이 아니며, 바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하나님 앞에서 두 왕국이 함께 언약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 언약은 두 왕국의 교회들이 반드시 (장로교회와 같은 예로) 개혁되어지고, 주교 제도와의 비겁한 타협들에서는 후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비겁한 타협들이란 영국국교도 출신의 국왕을 받아드리거나, 영국내에 국교회들을 세우는 것에대한 용납을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들로, 그들은 국왕의 해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지는 교회와, 언약자체에 대해서 배신을 한 정부에 대해서 ‘반대(dissent)’의 위치에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개혁장로교회의 시발점으로서 공유되어지는 역사가 있게 된다. 이러한 공통의 경험은 조직된 교회들이 발전하고 그 교회들이 유지되도록 하는 구심점이 되는 유대감을 만들게 된다. 이 역사는 단순히 그 당시 거기에 참여했던 이들 뿐 아니라, 그 것을 잇고 있는 세대들에게도 공히 연결되어진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비록 그것이 간접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또 전해진다.

    여기에서 교회의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신앙(신념)이 또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면으로서, 종교인 면에서 개혁된 교회는 정부와 독립되어지면서 정부는 개혁교회들을 돕고 지원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국교회의 설립으로 언약을 파괴하고 있는 정부를 반대하며 이러한 정부에 굴복하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분리할 것을 주장한 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신념은 역사적으로도 교회와 정부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계속 세워나가고, 교회와 정부가 함께 할 수 없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에서 반대하는 부정적인 면을 요구하며 이어내려온다. 이러한 신념의 부정적인 측면은 사실 교회의 멤버쉽을 정의하는데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대를 위해서는 특정한 법률과 그것들에 대한 부재, 그리고 실재적인 것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통되어지는 신념의 긍정적인 요소는 교회가 취해야 하는 행동들에 자극제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반대주장으로 인해 종종 극심한 코너에 몰린 듯 보이기도 해왔지만, 이 주장을 사회속에 관찰시키기위한 담대한 전진들에 대한 책임감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공유되어지는 역사와 신념들은 공통된 예배 형식으로 재 실행되어졌다. 그 당시 시대적 환경은 공통의 예배에 대해 특별한 신랄함을 안겨다 준다. 1644년 ‘quitting of the manse’이후, 이들의 예배는 보다 비공식적이 되었고, 위험의 정도는 급격히 증가되어졌다. 은신하던 목회자들이 설교와 성례 집행을 위해 나타낼 때에만 군인(drgoons)들의 감시망에 주의하며 그들은 비밀집회를 열게된다. 조금더 사적으로 그들은 ‘societies’라고 불리는 보다 작은 그룹으로 모이기도 하였다.(여기서는 평신도가 예배를 진행하였다.) 이 societies는 노회와 총회가 더 이상 모습을 갖추지 않은 이래로, 비공식적인 교회정부의 모습 역시 제공하게 된다. 그들은 필수적인 결정들이 요구되어져야 할 때 ‘general meetings’으로 각각의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많은 년 수동안 그들에게 적절한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박해기간동안의 그들의 습성들로 인해 ‘mountain men’ 으로 불려지기도 했고, 그들의 지도자인 리차드 카멜론(Richard Cameron)을 따라 카멜로니안들(Cameronians)이라고도 불려졌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1688년 이후 목회자 없이 그들만이 ‘societies’안에서 예배갖어왔던 이유로 ‘society people’이라고 불려진다.

    18년이 지난 1706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존 맥밀란(John McMillan)목사가 그들의 조직에 동참하게 되고, 1743년에는 Associate Presbytery로 부터 토마스 네이른(Thomas Nairn)목사가 오게된다. 이 두 명의 목회자는 개혁(reformed)이라고 불리는 노회를 적절하게 구성하게된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교회로 부터 개혁을 하기(reforming) 위해 그러한 이름을 사용하기보다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이해하기를 그들이 종교개혁의 달성을 목격하려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역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미국의 개혁장로주의자들과 동반한다.

    계속이어집니다.

    1. 당신은 구약과 신약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삶과 믿음의 유일하고 오류 없는 기준임을 믿습니까?
    1.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살아 계시고 진실하신 한 분 하나님을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믿습니까?
    1. 당신은 당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맞선 죄인으로서 죄책과 무력함을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님이자 구세주로 공언하며 그를 섬기는 데 당신의 일생을 바치겠습니까? 당신은 모든죄를 멀리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모범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서약하십니까?
    1. 당신은 성경에 근거를 두며 실질적으로 북미개혁장로교회의 헌법에 명시된 이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에 복종할 것을 주님 안에서 약속하십니까? 당신은 교회 내의 다른 이들과 협력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주님을 섬기도록 돕고 격려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당신이 교리나 혹은 삶에 있어서 교정이 필요가 있을 경우, 교회의 권위와 권징에 존중하기로약속하십니까?
    1. 최후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장이 있도록, 당신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며 주일을 지키고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정해진 성찬식에 참여하며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 주시는 대로 주의 일을위하여 당신을 드리기로 약속하십니까?
    1. 당신은 삶의 모든 관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먼저 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으로서 당신의 모든 의무를 충성되이 감당하며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것을 결심하십니까?
    1. 당신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기쁨으로 당신의 증거를 드리기 원하는 것처럼, 당신의 이러한 삶의 목적과 믿음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의 은혜에 의지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겠습니까?
  • “왜 우리는 공예배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가?”라는 주제로, Crown&Covenant에서 출간한 작은 팜플렛을 번역하였습니다.(번역: 양남식)

    우리 개혁장로교회의 많은 방문객들은 대부분의 현대의 복음주의적 교회들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찬송집에 대하여 놀라움을 갖는다. 우리의 찬송집은 성경 안에 기록되어진 150편의 시편을 음율에 맞춘 버젼만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적인 확신으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의 시편을 그 분의 백성들이 공적 예배 중에 부르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믿는다. 더불어 시편 찬송 외에  보증된 다른 그 어떤 것도 있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여러분이 보다 진지하고, 또한 기도하며, 시편만을 찬송으로 부르는 이 주제 (exclusive psalmody)에 대한 성경적인 논지들을 고민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다.

    기본적인 원칙들

    1. 시편의 충분성 (The sufficiency of the Psalms)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 16)”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충분하다.

    성경에서의 시편은 노래로 불려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은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 그 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사람이 지은 찬송가가 예배 안에서 사용되어질 필수 전제는,단지 시편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을 하는데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들을 거부함과 동시에 시편의150편만이 모든 세대를 아우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완벽하게 충분한 찬송가로  믿는다.

    1. 예배의 규정적 원리 (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어져오는 교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지켜온 교리이다. 이 원리는 성경 신명기 12장 32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

    16세기의 개혁주의 자들은 다음의 표현을 가지고 이 원리를 설명했다.  “무엇이든 예배 안에서이뤄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해 명령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금지된다.”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분 자신의 계시하신뜻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망상과 고안, 사단의 지시에 따르거나, 어떤 가견적 예배 대상 앞에서 혹은 성경이 말하지 않은 방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 “

    여기에서의 기본적인 신념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하는지 결정하는 하나님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로 모일 때에 성경의 시편을부를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인간 스스로 만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명하지 않으셨다. 예배의 규정적 윈리의 일관된 적용으로, 하나님께서 예배에 명하지 않은 노래들의 사용은 배제된다.

    1. 언약의 연속성

    시편은, 신약 시대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반영하는 찬송으로 보충되야만 하는구약 성경의 찬양이라는 점이 논의되어져 왔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성경의 시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로운 언약을 선포하는 제일의 목적을 위해 쓰어졌다는 사실을겸손하게 지적하는 바이다.

    사실 예수님 스스로 시편이 그 분 자신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언급하셨다 (누가복음 24장 44절).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은 아주 놀랍게도 시편들 안에서 예시되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들이 단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만 시편을 부르는 것으로 요구받았으며, 시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진가를 완전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시편 찬양을 버려두는 것이라면,이는 굉장히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시편들의 영광스러로움이 구약에 의해 예언되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으로인해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언약 그대로에 들어맞는 전개에 있다고 믿는다. 새 언약의 자손들로서, 우리는 시편을 바라보고, 모든 시대를 통한 그의 약속의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

    우리는 아무런 의미없이 성경 자체의 찬양집이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의 페이지 안에서 발견 된다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을 마치 구식으로 취급하며 거의 대부분을 신약성경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구약성경은 우리가 배워야 할 한낱 도덕적 규범에관한 이야기들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이 낡은 것, 혹은 시대에 뒤쳐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이 모든 성경은 성경의 감동으로 것으로 유익하니” 라고 기록하였을 때, 그는 구약 성경 역시 여기서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편을 통한구약의 예언들이 교회의 찬양으로 정착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그들의 유산을 계속해서, 시대를 거쳐, 상기할수 있을 것이다.

    1. 예배의 목적

    시편 찬송이란 주제에 대하여 또 한가지 염두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예배의 속성과 목적에있다. 우리는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 안에서는 사람 중심의 예배가 되고 있다. 사람 중심의 예배는 예배를 통해무언가 얻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예배자들의 감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는살아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실로”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예배의 목적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이유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드리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예배 가운데로 나아갈 때, 그들은 복을 받을것이다. 만약, 예배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의 방식을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그들은 어떠한 감정이 격동됨을 경험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면, 하나님은 이 예배 안에서 영광받지 못하신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들이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레위기 10장 1절)”을 드렸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접근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되려 인간 중심이었기에,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진노에 휩싸이고 죽음을 맞이 한다.

    예배에서의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생각해 낸 하나님을 향한 접근 방식이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하나님 그분의 디자인을 따라 그분께 나아가고자 결단하며,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을 찬양하는데  집중해야만 한다.

    시편찬송의 유익

    1. 오류가 없는 시편찬송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모여 찬양을 드릴 때, 우리는특별한 방식 안에서 하나님의임재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예배 찬송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드려진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가 찬양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 또한 완벽하고 흠이 없어야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저자가 된 찬송이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하지 못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오하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만이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직접 작성하신 노래를 가지고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찬송이 오류와 흠 없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시편을 부르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는지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주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람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으로 오류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노래만을 부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시고, 그분을따라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의심할 것 없이, 세대를 걸치면서 많은 경건한 이들이 지은 아름답고 유익한 찬송들이 분명존재한다. 성경의 시편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 가운데 불려져야 한다는 우리의 확신이 이러한 사실을 비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불어 이러한 찬송들이 성도의 삶에 어디에도 위치할 곳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저 말하는 바는 이러한 찬송들의 위치가 공적인 예배 가운데는 없다는 점이다.

    1. 성경 암송을 증진시키는 시편찬송

    시편을 부름에 있어 또 다른 놀라운 유익은 성경 암송에 있다. 노래의 반복은 어떠한 내용을암송하는데 최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바 없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광고송을 기억하고 있는가?)  매 주일 예배에서 시편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심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시편을 따라 부르며 하나님을 높이는 어린이들과 모든 회중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는가!

    1. 성령의 능력을 갖는 시편 찬송

    제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관통하고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부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러한 약속을 받았다. 히브리서 4장 12절이 우리를 확신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및 관절과 골수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시편을 부를 때에 인간이 만든 찬송가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신다. 좋은 찬송이 그저 우리의 감정을 격동시킨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찌르고 쪼개신다.

    1. 적절하게 균형잡힌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 시편 찬송

    어린이에게 양배추과 젤리빈 사이에서의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봐라. 둘 중 어는 것을 아이가 선택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것을 선택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어떠한 것들이 사실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들이 되기도 한다. 예배에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 것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특별히 선호하는 몇몇의 주제들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모든뜻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은혜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꼭 필요함에도, 우리가 이해하고 소화시키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워보이는 주제들도 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생각만을 쫒는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가장 호감이 되는 주제들만을집중적으로 예배 안에서 부르게 될 수 있다 (가령 은혜, 사랑, 구원의 주제들). 그리고 그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 조금 덜 매력을 느끼게 되는 주제들을 한 켠으로 방치시킬 수 있다 (예,악인에 대한 심판과 비난).

    대다수의 찬송가들을 검토한다면, 이러한 요지가 더욱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심판모두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루시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만을 지지하여 또다른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속성을 전체적으로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모든 속성을 고려하고 묵상해야만 한다.

    시편의 책 속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 그리고 구원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저주또한 꺼리낌 없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시편은 하나님의 모든 뜻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찬양의 책이자, 달면서도 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으로 공급하는 양식이다.

    1. 연합의 기초를 제공하는 시편찬송

    이 시대에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종류의 찬송집이 있다. 이러한 책은각 교회들의 특정한 신학적 유산과 확신을 반영하고 있는 찬송들을 포함하고 있다. 때로는다른 교단 교리에서 동의 할 수 없는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찬송들도 그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때문이다.

    말하자면, 시편은 나뉘어진 교단의 선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하나의 찬송가를 제공한다. 시편은 어떠한 개별, 혹은 그룹의 특정한 교리적 이해를 반영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끌어주고, 시편의 모든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 우주적으로 수용되어진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노래들을 가지고 찬양을 드리며 교회들이 하나를 이루는 그 발걸음을 상상해 보아라. 우리가 애호하는교리들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며 성경의 시편들의 광대한 주제들을 함께 배워나가게 될 것이다.

    이 소책자는 공예배에서의 실제적인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관하여 단지 표면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러한 확신 속에 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러한 짦은 설명들이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더불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시편찬송의 경이로운 유익의 일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전해졌기를 기대한다. 여러분은 이 주제에 대하여 더욱 심화된질문들을 가지고 있을텐데, 또 시편 찬송과  관련된 또 다른 책들을 읽어보기를 기꺼이 추천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을 허락하시기를!

    translated by Yangs

    ⓒ 1996, 2008 Douglas W. Comin, Crown & Covenant Publications

  • 2013년 12월 로스엔젤레스 지역의 한 선교단체에서 진행된 세미나 동영상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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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네바 대학교 웹사이트 바로가기

    RPTS(개혁장로교회신학교) 웹사이트 바로가기

    Crown & Covenant(출판사) 웹사이트 바로가기

  • 시편을 부르는 것만이 개혁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역사적인 개혁교회들은 시편을 불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시편을 부르는 것은 가장 성경에 가까운 그리고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분명하게도, 시편 150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찬송집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들어서야 시편 찬송에 대한 논의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한국의 개혁교회들을 바라보며, 단지 시편찬송만을 너무 강조하여 또 다른 개혁교회의 귀한 유산들을 놓칠까 염려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을 부른 것 또한 그 중 하나이고,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을 부르고자 한다는 것은 개혁교회가 가지는 개혁의 의지와 실행입니다. 실행과 공부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개혁교회가 하는 일은 공부하고 그 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근거한 것들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더욱 가까워져가는 열망과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찬송가를 내려놓고 시편찬송가를 손에 올려놓는 일이 바로 실행입니다. 공부에서 나오는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고 있는 찬송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무런 비판없이 그것을 흥얼거립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일은 보수적 것이고, CCM을 부르것은 너무 자유적이다라며 스스로의 잣대를 만들어냅니다. 찬송가와 CCM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느린 음악과 빠른음악? 묵직함과 가벼움?

    시편찬송을 그 옆에 가져놓았을 때에는, 찬송가와 CCM이 같은 집합안에 있습니다. 그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찬송가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직접 주신 영감있는 노래이구요.

    다시 강조합니다.

    공부해 보십시요.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요.

    색안경을 벗고, 불안감을 내려놓고, 시편을 부른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부르십시요.

     

    P.S.

    결과물들을 보게됩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신 여러분께 묻습니다. 아마 찬송가를 보지 않고도 수십 곡 이상을 따라부르실 것입니다. 갓난 아기 때부터 시편을 붙들고 시편을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작은 성경이라고 부르는 시편을, 예수그리스도께서 곳곳에 드러나시는 시편을 자연스럽게 따라부르고 머릿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면…성경에 대한 이해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것이 깊은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게 되는 시작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없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우리가 아무리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여기 저기를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이 목적(찬양)을 이루는 데 있어서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시편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찬송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입에 허락하신 찬송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John Calvin (The Genevan Psalter,1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