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도들의 후예, 북미주 개혁장로교회의 역사 – 서두 (원서: Transplanted to America by David M.Carson)

아래의 내용은 David M.Carson 박사의 박사논문 Transplanted to America(부제: A popular History of the American Covenanters to 1871)의 첫 부분을 번역한 내용입니다.(양남식 번역)

교정이 필요한 첫 번째 드래프트 입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서두(Introduction)

개혁장로교회는 그들의 기원을 거칠고 급변했던 역사들로 가득 찬 16-17세기의 스코틀랜드에 두고 있다. 그들의 원리와 자각속에서 발전된 관점들은 그 당시의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사건들에 대한 응답이다. 18세기 초, 이러한 원리들은 확고한 믿음의 형태들로 결정체를 이루어가며, 신대륙으로 이민을 간 여러 개인들을 통해 미국으로 전달되어졌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소개하기 위해셔는 간략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역사가 필수적으로 뒷 받침 되어야만 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대륙에서의 학업 동안 일부 루터파의 가르침을 흡수한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으로 부터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1528년, 그가 전하는 사상들을 막고자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의 화형의 연기들은 바람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신념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넓게 확산되어졌다. 그리고는 이 운동은 갑작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거의 1560년 일년 사이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변화되어진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법에 의한 종교개혁의 성취를 선언하게 되고, 개혁된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가 처음으로 만남을 갖는다.

그 해의 변화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존 낙스이다. 그의 개혁신앙으로 인해 일찍이 추방당했던 그는 제네바로 피신하였다가 존 칼빈과 제네바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1560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죽음은 맞이하는 1572년까지의 12년 동안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낙스의 설교로 인해 깨우쳐졌으며, 카톨릭 옹호자인 메리와의 격전속에서 정치인이자 목회자로서 보여준 낙스의 두려움없는 모습에 더욱 담대함을 얻어갔다.(첫 번째 권징집은 장로교회 체계의 초기 형식의 윤곽을 그려주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또한 낙스를 통해 칼빈 신학의 영향을 받게된다. 그렇게 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정치체계에 있어서는 장로교회가, 교리에 있어서는 개혁교회 또는 칼빈주의자들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인 1603년 죽음을 맞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통합) 영국 왕국의 제임스 1세가 된다. 어린 왕 제임스 1세는 권징에 있어서 너무 완고했던 그의 장로교인 후견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좀 더 성숙한 나이가 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divine-right)에 입각한 절대군주가 되기 위해 영국의 주교들을 다시 찾게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제임스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괴멸시키고 스코틀랜드에 국교회를 세우고자 한다.

더욱 고조되어진 긴장은 1637년에 영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받은 기도책을 에딘버러의 성 길레스(St.Giles)교회의 예배에서 처음 사용되면서 폭발하게 된다. 여기서 불러일으킨 정서는 1638년 National Covenant에서 그 표현이 그대로 들어난다. 1638년 National Covenant 는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서약되었고, 그 결과로 장엄한 주교전쟁(the Bishops Wars)의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의회 역시 공통적인 이유들 안에서 스코틀랜드의 손을 들어주며, Solemn League and Covenant로 엄숙 동맹을 맺는다. 영국인들에게는 동맹으로 또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언약이 되는 이 연합은 개혁된 기독교와 의회의 정당한 권리와 특권을 위해 성사되었다.

여기에 이어 영국의 시민전쟁(Civil War)이라는 유사한 역사가 발생한다. 찰스 1세의 패배와 처형으로 의회내의 장로교인들을 잠시 동안의 통치가 이루어졌다.(이로 인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회집과 그들을 통해 가히 놀랄만할 문서들이 –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 만들어진다.) 그 역사는 얼마지나지 않아, 크롬웰 집안의 짧은 지배와 마지막의 스튜워트 가문의 복귀로 이어진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의 회복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깨달은 것은 이전과 아주 유사한 문제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찰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언약으로 맹세했던 것 조차도 그를 장로교인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1660년 그가 왕권을 잡은 이 후 4년 동안 무려 400명의 목회자들이 스코틀랜드내의 영국국교회의 속성들이 자라나는 것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와 위치에서 쫓게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약 25년 정도의 시간동안은 스코틀랜드에 약간의 평화가 있는듯 싶었다.

목회자들 중 어느정도의 타협의 의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왕이 재차 관용을 베풀며 고위관직제의 영향아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그들의 목회지로 돌아가도록 설득됐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여전히 설득당하지 않은 무리들이 남아있었으며, 타협으로 왕의 관용을 얻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거부하는 성도들도 나오게된다. 그러한 두 그룹의 선은 더욱 극명하게 그려지게 되고, 마침내 1680년 리차드 카메론은 샌쿼할(sanquhar)이라는 마을로 들어가 시장내의 십자가위에 폭군이자 강탈자인 찰스 스튜어트와 의절하겠다는 선언서를 붙이게된다.

이것은 찰스와 그의 동조자들이 유죄로 인정한 종교적인 범죄위에 반역이라는 죄를 더 얻어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메론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그 후 8년동안 너무나 끔찍한 박해를 받게 된다. 이것이 황무지에서 비밀 집회를 가지고, Claverhouse 와 the dragoons의 날들이며, the Test Oath 의 날들, 그리고 악취나는 감혹과 순교자들의 무덤들에서 예배드리던 시간들, killing time 이다.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왕의 페위에 동참하게된다. 오렌지의 윌리암 왕자가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네델란드로 왔을 때, 그 곳에는 두 개의 왕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울 만한 평화로운 기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게, 그는 그 곳 두 왕국들에 그들 각각의 교회를 세우는 것을 제안하게 한다. 평화가 약속된 듯한 그런 타협은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결국은 그러한 방식이 정착된다. 그 이후로 영국은 국교회 국가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 일부 평신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의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그들이 왕에게 통치되지 않는 교회를 이루고자 싸워왔다는 것에서 야기된다. 현재로써는 왕의 대사 없이는 총회가 소집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왕이 할 일이 아니며, 바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하나님 앞에서 두 왕국이 함께 언약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 언약은 두 왕국의 교회들이 반드시 (장로교회와 같은 예로) 개혁되어지고, 주교 제도와의 비겁한 타협들에서는 후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비겁한 타협들이란 영국국교도 출신의 국왕을 받아드리거나, 영국내에 국교회들을 세우는 것에대한 용납을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들로, 그들은 국왕의 해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지는 교회와, 언약자체에 대해서 배신을 한 정부에 대해서 ‘반대(dissent)’의 위치에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개혁장로교회의 시발점으로서 공유되어지는 역사가 있게 된다. 이러한 공통의 경험은 조직된 교회들이 발전하고 그 교회들이 유지되도록 하는 구심점이 되는 유대감을 만들게 된다. 이 역사는 단순히 그 당시 거기에 참여했던 이들 뿐 아니라, 그 것을 잇고 있는 세대들에게도 공히 연결되어진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비록 그것이 간접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또 전해진다.

여기에서 교회의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신앙(신념)이 또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면으로서, 종교인 면에서 개혁된 교회는 정부와 독립되어지면서 정부는 개혁교회들을 돕고 지원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국교회의 설립으로 언약을 파괴하고 있는 정부를 반대하며 이러한 정부에 굴복하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분리할 것을 주장한 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신념은 역사적으로도 교회와 정부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계속 세워나가고, 교회와 정부가 함께 할 수 없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에서 반대하는 부정적인 면을 요구하며 이어내려온다. 이러한 신념의 부정적인 측면은 사실 교회의 멤버쉽을 정의하는데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대를 위해서는 특정한 법률과 그것들에 대한 부재, 그리고 실재적인 것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통되어지는 신념의 긍정적인 요소는 교회가 취해야 하는 행동들에 자극제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반대주장으로 인해 종종 극심한 코너에 몰린 듯 보이기도 해왔지만, 이 주장을 사회속에 관찰시키기위한 담대한 전진들에 대한 책임감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공유되어지는 역사와 신념들은 공통된 예배 형식으로 재 실행되어졌다. 그 당시 시대적 환경은 공통의 예배에 대해 특별한 신랄함을 안겨다 준다. 1644년 ‘quitting of the manse’이후, 이들의 예배는 보다 비공식적이 되었고, 위험의 정도는 급격히 증가되어졌다. 은신하던 목회자들이 설교와 성례 집행을 위해 나타낼 때에만 군인(drgoons)들의 감시망에 주의하며 그들은 비밀집회를 열게된다. 조금더 사적으로 그들은 ‘societies’라고 불리는 보다 작은 그룹으로 모이기도 하였다.(여기서는 평신도가 예배를 진행하였다.) 이 societies는 노회와 총회가 더 이상 모습을 갖추지 않은 이래로, 비공식적인 교회정부의 모습 역시 제공하게 된다. 그들은 필수적인 결정들이 요구되어져야 할 때 ‘general meetings’으로 각각의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많은 년 수동안 그들에게 적절한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박해기간동안의 그들의 습성들로 인해 ‘mountain men’ 으로 불려지기도 했고, 그들의 지도자인 리차드 카멜론(Richard Cameron)을 따라 카멜로니안들(Cameronians)이라고도 불려졌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1688년 이후 목회자 없이 그들만이 ‘societies’안에서 예배갖어왔던 이유로 ‘society people’이라고 불려진다.

18년이 지난 1706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존 맥밀란(John McMillan)목사가 그들의 조직에 동참하게 되고, 1743년에는 Associate Presbytery로 부터 토마스 네이른(Thomas Nairn)목사가 오게된다. 이 두 명의 목회자는 개혁(reformed)이라고 불리는 노회를 적절하게 구성하게된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교회로 부터 개혁을 하기(reforming) 위해 그러한 이름을 사용하기보다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이해하기를 그들이 종교개혁의 달성을 목격하려는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역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미국의 개혁장로주의자들과 동반한다.

계속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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